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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겨울, 커피 향 속에 피어난 첫사랑 — 플루트를 연주하던 그녀의 이야기
그 겨울, 커피 향 속에 피어난 첫사랑 — 플루트를 연주하던 그녀의 이야기

서투른 첫사랑을 끝낸 나는 한동안 방황했다.
덕분에 1학년 2학기 성적은 1.75라는 처참한 숫자로 마무리되었다.
(성적표를 본 부모님 덕분에 내 인생도 마무리될 뻔했다.)
겨울방학엔 계절학기도,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잉여 중의 잉여로 지냈다.
Toy 1집을 듣고 울고,
2집을 듣고 또 울고,
3집, 4집을 듣고 또 울었다.
정신 차리면 리니지2 레벨업에 몰두하고…
“뭐지, 이건?”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의미 없는 나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PC방-편의점-원룸 루트 사이에 새로운 무언가가 생겼다.
바로 당시 막 유행을 시작하던 커피 전문점이었다.
뚝딱뚝딱 공사를 하더니 금세 K모 커피전문점이 문을 열었다.
그때는 내가 살던 동네에 브랜드 커피숍이라고는 스타벅스 한 군데뿐이었다.
그것도 학교에서 30분은 나가야 했다.
공사가 끝나고 커피 볶는 향이 거리에 퍼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로스팅이 썩 제대로 된 것도 아니었고,
살짝 탄 원두 맛이 나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그땐 동네의 일대 사건이었다.
점심때면 테이크아웃 커피를 사려는 사람들로 줄이 늘어섰다.
그 커피숍 앞을 지나던 어느 날,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테이크아웃 창가로 얼굴을 내민 그녀를 처음 보았다.
끝을 둥글게 만 짙은 갈색 단발머리,
립스틱을 바르지 않았는데도 핑크빛으로 빛나는 입술,
하얀 얼굴과 선한 이목구비,
컵을 건네는 가늘고 긴 손가락.
그녀를 바라본 시간은 몇 초도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커피라곤 자판기 커피나 맥심 믹스밖에 모르던 내가
분수에 맞지 않게 매일 에스프레소 세 잔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겨울방학 내내
학과실–커피숍–PC방–편의점–원룸의 무한루프를 돌며
조금 더 잉여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매일 에스프레소를 벌컥벌컥 마시고 가는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얼굴이 다 붉어진다.
어느 날, 강의실로 가던 중
음대 2층 연습실 창문 너머에서 그녀를 다시 봤다.
플루트를 전공하는 듯했다.
그래서 손가락이 그렇게 예뻤구나 싶었다.
그 후 나는 그녀의 이동 경로를 눈여겨보며
매일 마주치기를 시도했다.
이번에는 섣불리 아는 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가 먼저 가볍게 목례를 했다.
나도 쑥스러운 척하며 답인사를 했다.
하루에 마주치는 건 많아야 두세 번.
학교에서 한 번, 커피숍에서 한 번쯤이었다.
악기를 다룬다는 공통점이라도 있으면
관심을 더 받을까 싶어
바이올린 케이스만 들고 다닌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학교 축제날이었다.
시끌벅적한 공연 소리를 피해
나는 늘 가던 커피숍으로 향했다.
평소 함께 일하던 점장은 보이지 않았다.
“플루트 연주하시는 거 봤어요.”
입 밖으로 툭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바알갛게 물들었다.
“언제 한번 들려주세요.”
그 말까지 덧붙였다.
그녀의 얼굴이 더 붉게 물들었다.
그날 나는 필을 받았다.
“학생이신데 축제 안 보세요?”
“아르바이트가 9시까지라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정말 아름다웠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마치 노래처럼 들렸다.
용기를 냈다.
“아르바이트 끝나면 같이 불꽃놀이 보러 갈까요?”
순간 너무 유치한 말이었다 싶어 후회했다.
그녀는 웃으며 “청소랑 마감해서 열 시 넘어서 끝나요.”라고 했다.
나는 꼬리를 내리고 도망치듯 나왔다.
밤 열한 시쯤,
주점에서 일하던 신입생이 누가 나를 찾는다며 나왔다.
밖으로 나가보니 그녀였다.
“불꽃놀이 아직 안 끝났죠?”
“금방 끝나는데, 얼른 쓰고 갈까요?”
동동주 냄새가 날까 봐 신경이 쓰였지만,
나는 그녀를 에스코트했다.
불꽃놀이가 어디서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냥 함께 걷고 싶었다.
“막걸리 드실래요?”
오늘따라 정말 내가 왜 이러나 싶었다.
그런데 그녀가 “좋아요.”라고 답했다.
법대 주점으로 갔다.
술 냄새 가득한 자리에서 마주 앉으니
어색함이 가득했다.
잠시 후 그녀가 말했다.
“사실 일주일 전부터 눈치채고 있었어요.”
나는 민망해서 막걸리를 들이켰다.
“그래도 긴가민가했는데,
오늘 말씀하셔서 확신했어요.”
그녀는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 예뻐서 숨이 막혔다.
조명 하나 없는 어둑한 잔디밭이었지만
그녀는 그 자체로 빛났다.
그녀는 이번 학기가 끝나면 유학을 간다고 했다.
학교 다니면서 단 한 번도
누군가와 함께 축제를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매일 알바, 연습, 레슨으로 바빴고,
불확실한 미래와 비교 속에서 늘 힘들었다고 했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를 보며
술을 많이 못 하는구나 싶었다.
술기운을 식힐 겸 같이 걷자고 했다.
비틀거리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았다.
그녀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시간은 어느새 버스가 끊길 무렵이었다.
그녀의 집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었다.
가로등 불빛 아래 조용한 거리를 걸었다.
골목을 돌아 작은 공원이 나왔고,
그녀는 플루트 케이스를 열었다.
‘G선상의 아리아’.
연주가 끝나도 여운은 골목을 따라 흘렀다.
그녀의 이마에
나도 모르게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후 집 앞까지 손을 잡고 걸었다.
그 후에도 나는 매일 에스프레소 세 잔을 마시러 갔고,
그녀는 언제나 따뜻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몇 번 더 만나
없는 용돈을 쪼개 파스타도 먹고
무리해서 스테이크도 한 번쯤 먹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유학을 떠났다.
나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그녀의 꿈을 지탱할 힘이 내게 없다는
비겁한 생각 때문이었다.
몇 년 후, 종로 어딘가를 걷다
‘○○○ 귀국 독주회’ 포스터를 봤다.
여전히 고요하고 아름답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있었다.
나는 굳이 표를 한 장 사서
금호아트홀 구석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의 플루트 연주를 조용히 들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