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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3호 할아버지 잘 계시죠? 덕분에 많이 행복했어요

Profile surisuri
lv.114
추억
조회 51 댓글 0 좋아요 0 2025.08.27

저는 40대 후반 아줌마예요.
11년 전쯤 지금 사는 아파트로 이사를 왔어요.

요즘은 잘 안 하지만, 저는 여전히 떡 만드는 걸 좋아해서
직접 콩가루떡과 시루떡을 쪄서 이사떡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바로 윗집에 인사를 하러 갔어요.
벨을 눌렀는데 한참 소리가 나지 않아서 돌아서려는 순간,
문이 스르륵 열리더니 할아버지께서 나오셨어요.
옷을 입느라 늦으셨다고 하시면서요.

떡을 드리니
"요새는 이런 집도 잘 없는데, 감사합니다."
하시며 웃으시더라고요.

떡을 다 돌리고 집에 돌아오니,
저희 문 손잡이에 검은 비닐봉지 하나가 걸려 있었어요.
그 안에는 작은 호박 두 개와 호박잎,
그리고 정성껏 쓴 종이에 “반가워요”라고 적혀 있었죠.
저는 ‘아마 할아버지께서 주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며칠 뒤, 밖에서 휠체어를 타신 할머니와 산책 나오신 할아버지를 뵙게 되었어요.
반가운 마음에 호박 감사 인사를 드렸더니,
할아버지만 말씀하시고, 할머니는 거의 말씀을 못 하시더라고요.

알고 보니 4년 전쯤 뇌졸중으로 쓰러지셔서 거동이 많이 불편하셨고,
할아버지께서 혼자서 모든 걸 챙기시며 생활하신 거였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아침저녁으로 매일 두 번씩 산책을 시키고,
할머니 옷도 색색깔로 정성껏 갈아입히셨어요.
봄엔 꽃무늬, 여름엔 시원한 삼베, 가을엔 형형색색 코트,
신발까지 예쁜 걸로 신겨서 산책을 나가셨죠.

저도 뵐 때마다 반갑게 인사드리며,
음식 해 드릴 때는 가져다드리곤 했어요.
손이 큰 저는 식당 수준으로 음식할 때도 있었는데,
그날은 꼭 검은 비닐봉지에 쌀튀밥, 김부각, 깻잎, 콩잎, 장단콩, 귤, 사과, 곶감 등 다양한 걸 놓고 가셨어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하고 말려도, 꼬박꼬박 두고 가시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사건이 일어났어요.
낮에 혼자 집에서 가계부를 정리하고 있는데,
윗집에서 쿵 소리가 났어요.
평소엔 휠체어 소리조차 거의 안 나는데, 갑자기 소리가 나서 느낌이 좋지 않았습니다.

인터폰을 눌러도 받지 않으셔서, 얼른 올라가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촉이 이상하다 싶어 119에 신고했습니다.
금방 오셔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거실에서 할머니가 휠체어에서 떨어져 계셨습니다.

동대표 아저씨를 보호자로 삼아 급히 병원으로 이송하고,
할아버지께서 헐레벌떡 오셔서 자초지종을 설명드렸습니다.

다행히 큰일은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 마음이 스크래치 난 듯 아프더라고요.

다음날, 할아버지는 박카스 한 박스를 들고 감사 인사를 하러 오셨어요.
열쇠 수리비 10만 원과 함께 손에 쥐어주셨지만, 저는 괜찮다고 거절했죠.

그 뒤로 할아버지는 더욱 친절하셨어요.
남편이 아침 7시에 출근하는데, 할아버지는 아침 5시 30분에 나오셔서 차를 닦아주셨고,
겨울에는 얼어붙은 앞유리창까지 깨끗이 닦아주셨어요.

저도 받는 만큼 반찬을 만들어드렸고, 일주일에 두세 번씩 문 앞에는 다양한 채소와 간식거리가 걸려있었어요.
따끈한 옥수수, 요구르트 등, 늘 서프라이즈 선물 같았습니다.

그렇게 3년이 지나,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떠나시고,
자식들이 모시러 오면서 할아버지도 다음 주 이사를 가신다고 하셨어요.

너무 아쉬웠지만, 할아버지는
“아들만 둘인데, 막내딸이 생긴 기분”이라며 따뜻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 손에 옥가락지와 거북 모양 가락지를 쥐어주셨어요.
할머니가 남기신 소중한 물건이라며, 막내딸에게 주고 싶어 남겨두신 거라고 하셨죠.

몇 번 옥신각신하다 결국 받았고, 자식들이 오신 날 함께 배웅했습니다.
아들들도 할아버지를 통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 민망하면서도 뿌듯했어요.

그 후, 윗집에는 신혼부부가 이사 오고, 아이는 벌써 5살이 되어가네요.
엘리베이터에서 인사할 때마다 문득 할아버지가 떠올라요.
요즘 세상에도 아직 이렇게 따뜻한 분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면서요.

803호 할아버지, 잘 계시죠?
덕분에 많이 행복했어요.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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