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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처음 밤을 새운 날, 디아블로2가 남긴 어린 시절의 추억
아버지와 처음 밤을 새운 날, 디아블로2가 남긴 어린 시절의 추억

초2였나 초3이었나.
온게임넷이었는지 경민방송이었는지 기억은 흐릿한데,
그 시절엔 신규 게임 소개 코너가 꼭 하나쯤 있었다.
거기서 디아블로2를 봤다.
악마가 나오고, 어둡고, 괜히 멋있어 보였다.
게임이 너무 하고 싶어서
용돈 받은 거 2천 원 모아 피시방에 갔다.
그땐 피시방이 1시간에 2천 원이었다.
근데 어린 나이에 게임 이름을 제대로 외울 리가 있나.
“그… 블루 블루… 하는 거요” 하니까
아저씨가 “포트리스 블루?” 하더라.
“아니요, 악마 모양 나오는 거요…”
“아, 디아블로?”
“네!”
그랬더니 갑자기 표정이 바뀌었다.
“이 게임은 어린이가 할 게임이 아니야. 너 몇 살이야?”
그날은 결국
하프라이프를 하게 됐다.
아저씨는 근처에 있던 형을 불러
“얘 하프라이프 하는 법 좀 알려줘라” 하고 시켰다.
왜 디아는 안 되고 하프는 됐는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다만 그날 이후로
디아블로2가 더 간절해졌다.
집에 와서 그 얘기를 했을까.
아버지는 말없이 듣고만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아버지는 스타크래프트1이랑 리니지를 하시던 때였다.
아마 그날 밤,
내가 얼마나 하고 싶어 하는지
조용히 다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학교 앞 태권도 도장에서
“등록하면 이 중 하나 드려요” 하던 시절,
그 목록에 디아블로2 정품 패키지가 있었다.
냅다 신청서 받아와서 엄마한테 보여줬다가
등짝 맞고 바로 취소하러 갔다.
사범님 표정이 싱글벙글에서 굳어가는 걸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버지가 뭔가를 하나 들고 들어오셨다.
디아블로2 가이드북이었다.
정품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었지만
아버지 나름의 타협이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 정도면 되지 않을까” 하는.
액트 1-1부터 공략이 빽빽했고
직업별 설명도 있었다.
아마존: 아마는 패면 됨
팔라딘: 패면 됨
바바리안: 패면 됨
소서리스: 마나 아끼지 말고 지팡이로 패자
네크로맨서: 해골은 아직 유효함
지금 보면 웃기지만
그땐 진짜 진지했다.
그 책을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읽었다.
아버지는 그 모습을 봤을까.
아들이 게임 하나 때문에
책을 그렇게 파고드는 게
기특했을지도 모르고,
조금 걱정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
아버지가 먼저 말했다.
“이번 주말에… 피시방 가서 밤새볼래?”
엄마한테는
아버지와 아들의 시간이다,
밖에서 놀다 자고 들어온다
그렇게 설명했을 것 같다.
아버지가 아는 피시방으로 갔다.
반은 당구장, 반은 바, 그리고 피시방.
어른들 공간과
게임하는 사람들 공간이
이상하게 한데 섞여 있는 곳이었다.
밤 10시,
문 앞에서 막혔다.
“애는 안 됩니다.”
아버지는 잠깐도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제가 보호자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문이 열렸다.
그날 밤의 피시방은
사람은 많았는데 조용했다.
컵라면, 커피맛 땅콩, 만두.
아버지는 자기 게임을 했고
나는 처음으로 디아블로2를 했다.

아버지는 옆에서 계속 보진 않았을 것이다.
아마 가끔 힐끔힐끔
내 화면을 봤을 거다.
아들이 좋아하는 걸
몰래 확인하듯이.
새벽 6시쯤,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가자.”
밖으로 나오니
새벽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폐지 줍는 할아버지,
미화원 아저씨들,
쓰레기차,
출근하는 사람들.
그 풍경 속에서
아버지는
어쩌면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얘도 이제 이런 세상을 보겠구나.’
집에 가는 길,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재미있었냐?”
나는 짧게 대답했다.
“네.”
아버지는 그 한마디면
충분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나에겐 디아블로2가
게임이라기보다
아버지랑 함께 보낸
그날 새벽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